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영원히 지내고 싶다거나 후회되는 순간으로 돌아가서 과거를 고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 나처럼 많은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할 것 같아.
그런데 그건 사실… 지금도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 순간이 나에게는 이미 지났지만, 그 순간은 과거에 그대로 새겨져있다고 생각해. 영원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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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은 이별인 것 같아. 내가 키우는 채소를 먹기 위해서 죽이는 것조차도 나는 약간 감정이입이 돼서 불편함을 느끼고는 해. 먹으려고 키웠고 어쨌든 나는 그 채소가 아니더라도 뭐든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하잖아.
물론 굳이 내가 키워서 죽이는 행위까지 할 필요는 없긴 하지. 내가 소고기를 먹는다고 소를 잡을 필요는 없는 것처럼 말이야. 어쨌든 나는 지금 내가 먹으려고 키운 채소를 내가 죽여서 먹기로 결론을 내렸어. (그게 싫으면 지금이라도 계속 키우기만 하거나 그 채소를 키우는 행위를 앞으로 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그러면 나는 그 채소가 죽는 것을 어떤식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정의해야 그나마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거든.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모든 것은 이별인 것 같아. 그 채소를 포함해서 모든 생명이 나와 이별하고, 그 생명들도 삶과 이별하고, 나조차도 결국 삶과 이별하게 되는 거야.
단지 앞에 말했듯이 내가 싫으면 안 할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거야. 난 고기는 되도록 안 먹으려고 하는 것이고, 채소는 먹기로 한거야. 내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 말이야.
예를 들면 최근에 나는 효모를 먹으려고 하거든. (비타민B12가 많이 들었다고 하더라.) 사실 생각해보면 그 효모도 생명 아닌가?
그런데 나는 효모를 죽이는 것은 채소와 마찬가지로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만 불편하다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먹고 싶지 않고 그 종을 죽이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을 먹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거야.
눈에 보이는 동물은 그 동물에 강점이입이 되고 그 동물이 죽는 순간이 상상될 수 있잖아. 그 마음이 너무 과해지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면 다 같이 먹지 말자는 운동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야. (물론 그게 너무 과격하거나 극단적이거나 강제적이면 안 되겠지.)
그게 참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 법도 그런 것이거든. 옳고 그르다는 것조차도 사실 절대적인게 아니고 그저 다수가 정한 규칙일 뿐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개고기를 먹지 말자는 운동을 굳이 다수의 이기주의, 억지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거야. 하지만 그 논리가 너무 이상하거나 잘못됐으면, 남한테 피해를 주면 다수가 그것에 문제를 삼는 것도 똑같이 일리가 있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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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가 완전히 따로 새버렸는데…
죽음은 이별에 익숙해진다기보다는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야 할 것 같아. 가족, 친구, 애완동물이나 꼭 생명이 아니더라도 내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든 취미든 일이든 그 모든 것과 결국 언젠가는 이별을 하게 된다는 거야.
결국 마지막에는 나의 죽음, 나 자신과도 이별하게 되는 것이고 말이야. 전에도 썼지만 난 원래 처음부터 존재했던게 아니고 이 세상이랑 만난 거야. 만났으면 언젠가는 헤어질 때가 있는 것이고 말이야.
그리고 또 전에 따로 썼던 글의 내용처럼 나는 매일, 매 순간 나는 죽고 새로 태어난다고 생각해. 다시 말해서 매 순간 나와 만나고 이별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살아있는 것은 이별 후에 다시 만나는 것일 뿐이고, 내가 죽는 것은 이별 후에 다시 만남이 더는 없는 것일 뿐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