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조력사의 정의에 대해서 명확하게 하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조력사, 존엄사, 안락사 등등 용어도 여러가지로 나뉘는데 우리나라에서 “조력존엄사”라고 하는 의사가 환자의 죽음을 도와주는 적극적인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와 달리 치료만 중단하는 방식도 있다.)
나는 그냥 편하게 조력사라고 표현하겠다.
내가 조력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내 건강이 많이 안 좋았을 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속되고 심해지니까 그런 공포 속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그때는 일상이라는게 없다시피 했고 머릿속에 온통 죽음만 가득 차있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고 병이 들어서 그런 순간이 다시 찾아온다면 조력사를 통해서 사회의 도움을 받아 삶을 중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력사라는게 있다면 마음이 든든할 것 같다.
보험을 든 것처럼 미래에 대한 걱정을 덜고 현재에 집중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의 모든 순간을 재미있고 의미있게 살다가 깔끔하게 죽고 싶다.
내가 가장 무섭고 걱정되는 것은 죽음이 아니고 고통스러운 삶이다.
나이가 들고 병이 들면 낫기도 힘들겠지만 낫는다고 해도 결국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없는 삶이라면 고통스럽게 그 시간을 견디는 것 뿐이라면 하루를, 일주일을, 한달을, 1년을 더 사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시간은 살아간다고 보기도 힘들 것 같다.
그 지옥 같은 삶을 조금 더 편하게 중단시키려는 노력은 아주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수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듯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와 고통마저도 이겨낼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의 삶을 연장할지 말지의 결정은 내가 하고 싶다.
스스로의 목숨을 당사자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나?
환자 스스로가 삶을 중단하기를 원하는데 그것을 누구의 어떤 가치를 위해서 막고 반대할 수 있을까? (물론 조력사라는 것은 사회가 도와줘야만 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조력사가 합법화되면 죽고 싶지 않은데도 떠밀리듯이 조력사를 선택하게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한다.
그전까지는 헌신적이던 가족이 조력사가 생기고 돌변해서 환자에게 조력사를 선택하라며 부추길까?
조력사가 없는 지금 괜찮다면 조력사가 생겨도 괜찮을 것이고, 현재 조력사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면 그저 고통을 견디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면 당장은 버티고 있지만 결국 뉴스에 나오듯이 가족이 같이 자살하거나 아픈 가족을 죽이거나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나올 수밖에 없다.
오히려 조력사가 도입돼면 환자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비용과 인력에 여유가 생길 것이고 정말 살고 싶은 환자들이 더 마음 편하게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호스피스 돌봄 서비스를 강화하면 조력사는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거나 조력사를 도입하기 전에 돌봄 서비스부터 강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돌봄 같은 사회적 보호 시스템이 부족하니까 대신 조력사로 때우려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그것은 돌봄 서비스를 강화하고 나서 조력사를 도입하면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는 것을 막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초고령화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그런 말은 너무나도 막연한 말로 들린다.
구체적으로 돌봄 서비스를 어떻게 강화할 것이고 현실적인 방안은 무엇이고 언제 가능한지 기약이 있냐는 것이다.
환자와 환자의 가족이 받는 고통, 의료비 부담 등 그런 문제들이 언제 해결될 줄 알고 기다리기만 하라는 것인가.
결국 그런 알량한 당위성 때문에 현재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조치도 도움도 주지 않겠다는 말 아닌가?
사람들에게 기약 없는 공수표만 날리며 고통을 끝내달라는 마지막 부탁까지도 거절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돌봄 서비스처럼 조력사도 사회가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줄 수 있는 도움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현재 문제가 되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해결이 된다고 해도 조력사를 원하고 조력사가 필요한 경우는 존재할 것이다.
돌봄 서비스 확충과 조력사는 우선순위가 있는게 아니고 개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각기 다른 부분이라는 것이다.
조력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조력사를 미룸으로써 해결책을 찾는 시간적인 여유를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 그런 태도는 너무나도 안일하고 잔인하다.
이미 대한민국은 자살률 1위에 노인 자살률은 더더욱 높다.
이미 현실이 지옥이라는 것이다.
나는 돌봄 서비스 확충을 핑계로 조력사를 미루려는 사람들 때문에라도 조력사가 어서 도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그들의 말이 진심이라면 한명이라도 더 조력사를 선택하지 않도록 돌봄 서비스를 더 빨리 확대하고 강화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겠는가?
‘조력존엄사법’, 의료계‧환자‧법조계 반대…‘죽음 강요 문화’ 생성 우려라는 기사를 보면 설문조사를 해보니 조력사 도입에 찬성하는 국민이 76.3%나 된다고 한다.
그 설문조사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가족의 조력사도 찬성하냐고 물어보면 그정도로 높게 나오지 않을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조력사라는 것은 당사자가 원하는지가 핵심이다.
오히려 가족의 조력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것이야말로 잘못된 설문조사인 것이다.
또한 조력사가 허용되더라도 가족끼리 대화를 통해서 결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설문조사에서 가족이 반대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 조력사를 허용하면 안 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조력사보다 자살이나 고통받다가 떠나는 환자를 본 가족의 후회와 상처가 더 클 수 있다.
오히려 조력사를 도입해서 가족들과 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면 어떤 방향으로 결론을 내리든지 가족에게 덜 상처가 되지 않을까?
조력사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의료기술이 발달했고 진통제도 좋아져서 환자들이 큰 고통 없이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려줘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나도 동의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도 조력사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겁을 먹고 자살을 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조력사 시스템을 통해 좋은 정보를 의사에게 얻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조력존엄사 시행 후 자살률 증가…의료계 주장 힘 실리나?라는 기사를 보면 어이가 없다.
조력사가 도입되면 자살률이 증가해서 조력사를 도입하면 안 된다?
자살률이 왜 중요한가?
왜 자살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그 문제를 찾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드는게 상식적인 태도 아닌가?
조력사를 도입하면 자살을 선택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날까?
그저 자살률 수치만을 문제로 보는 것은 인간과 가축을 동일시하는 것 아닌가?
가축으로 키우는 소, 돼지, 닭의 숫자가 야생동물보다 많다고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냐는 것이다.
나는 맹목적인 생존보다 인간답게 사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생명 경시가 우려된다는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존엄성 경시가 더 문제라고 말해주고 싶다.
도축 방법도 계속 동물들이 덜 고통받는 방식으로 개선되어 왔지 않나?
가축들을 죽일 때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인식하기도 전에 죽일 수 있게 된다면 그 가축들에게도 좋은 것이고 그 가축을 먹는 인간도 죄책감을 덜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아직까지도 자살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처럼 의학적으로 덜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존재하는데도 사회가 개인을 도와주지 않는 것은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말기 환자 진단을 받고 괴로워할 환자에게 자살을 희망하면 의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원하면 의사의 조력을 받아 힘든 고통을 겪지 않고 자살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 가족과 사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자살을 고려해보라는 권유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위의 내용을 반박하자면 이미 그 환자는 가족과 사회에 부담을 주고 있는 상태, 부담을 주고 있다고 느끼는 상태일 것이다.
그러면 이도저도 못하는 환자의 부담을 줄여주고 문제를 해결해 줄 생각을 해야지.
그냥 고통스럽고 불행하게라도 죽지만 말고 살아만 있으면 된다는 건가?
어떻게 자살을 권유하는 것일 수 있으니까 조력사를 도입하지 말자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정말 그들을 위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조력사를 반대하고 막을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노력은 하기 싫고 조력사를 도입하지 않는 것으로 때우려는 것 아닌가?
맹목적으로 죽음만을 반대하며 사실 그들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조력사가 도입되면 기존의 사회 문제들이 더 도드라져보일테니)
또한 조력사를 원하는 사람들을 나약하고 한심하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면 조력사 만연이라는 표현을 쓸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김 교수는 “자살에 관한 결정을 온전히 할 수 있는 환자라면 자살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시하며 “환자가 자살이 이로울 만큼 신체적·심리적으로 악화한 상태면 그 사람의 의사를 정말 온전한 의사로 봐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위 말은 비정상적인 상태의 나약한 사람만 자살을 한다는 말이고 조력사는 애초에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조력사를 원하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것이다.
현실을 모르고 그냥 우물 속의 개구리처럼 혼자 머릿속에서 생각해낸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말이다.
사람마다 각자 처한 문제, 힘듦이 있고 생각하는 해결책도 다 다르다.
그 다름을 존중하지 않는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저 논리로 독립운동으로 목숨을 바친 위인들도 비하할 수 있다.
어떻게든 생존하면서 나라를 위해 기여할 수 있을텐데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며 말이다.
그리고 저 말이 한심한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정말 정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겨지는 신체적으로도 건강한 사람은 애초에 조력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당연히 정상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상황적으로도 문제가 없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스럽지 않다면 왜 자살을 하고 조력사를 원할까.
현실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개선이 되지 않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으니 자살을 하고 조력사를 원하겠지.
자살이나 조력사는 현실에서 도망친다기보다 아주 적극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너무 고통스럽고 불행하고 앞날의 희망도 없다면 스스로 삶을 중단하기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감정적, 즉흥적으로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누구보다 이성적인 이유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
정말 나약한 사람은 자살이든 조력사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용기조차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단지 조력사가 인간을, 생명을 죽이는 일이니까 반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또는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걸 핑계로 댄다거나)
정말 조력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한다면 내 신념 때문에 조력사를 돕지는 못하더라도 막고 반대하고 미루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나도 조력사를 원하는 환자들의 심정을 모른다.
하지만 조력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말은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예를 들어 의사가 자신의 신념 때문에 조력사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을 거부할 수는 있다.
그러면 그것은 다른 의사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저 내가 싫다고 조력사 도입 자체를 반대하고 참견해서 내가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의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노인의 비중이 계속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파장이 클 것이라고 한다.
노인들 다수가 조력사를 원하게 된다면 문제가 있는 환경을 고치고 개선시킬 생각을 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조력사로 도움을 주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통스럽게 살거나 스스로 자살하는 수밖에 없다.
고령화로 인한 사회문제 역시 조력사를 미루거나 도입하지 않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종교계는 조력사에 대해서 의견을 낼 권한이 없다고 생각하고 의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의사는 환자가 조력사에 합당한 환자인지 아닌지를 의학적으로 판단하는 권한이 있는 것이지, 조력사 자체를 도입할지 말지에 대해서 결정할 권한은 없고 그들의 의견에 특별히 비중을 둘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법조계와 의료계는 조력사를 도입할지 말지를 결정하는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부작용을 최소화할지를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작용이 걱정돼서 도입을 반대한다는 말은 부작용의 위험성을 항상 감수해야 하는 수술, 약 처방을 하는 의료인들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력사는 결국 스스로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고 사회가 그 선택을 도와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 전체, 개개인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의사는 의료 기술 때문에 존중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낫게 해달라고, 살려달라고 부탁하는 환자의 부탁을 들어주기 때문에 존중을 받는 거라고 생각한다.
환자의 죽고 싶다는 부탁도 똑같은 부탁이다.
조력사는 어떻게 보면 그저 자살할 사람, 자살을 원하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 사회는 자살을 막아야 하니까 조력사도 도입하면 안 되는 것일까?
자살은 막아야만 하는 것일까?
어쩌면 자살하고 싶지 않도록, 사회를 더 살고 싶게 만들어야 하는게 아닐까? (해와 바람이라는 동화가 떠오른다.)
자살, 조력사에 대한 입장, 생각이 다르다면 서로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조력사를 도입해서 조력사가 필요하고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에게 절차를 잘 거쳐서 조력사를 도와준다.
나는 그것도 힘들어하는 사람을 돕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력사로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막고 싶은 사람은 조력사로 죽는 사람들이 줄어들게 하기 위해 조력사를 반대할 것이 아니고 조력사를 원하는 사람들이 줄어들도록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고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냥 물리적으로, 법적으로 조력사 자체를 금지하려는 것은 오로지 생존자 수만 따져서 그 수치를 떨구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들을 존중한다면, 당장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개선시켜주지 못할거라면 기약 없는 공수표만 날리며 조력사라는 마지막 도움 요청까지 미루고 거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까놓고 말해서 죽고 싶다는 사람 못 죽게 해서 그사람이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까.
물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돕고 설득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저 죽으려면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도록 해서 그것을 자살의 방지턱으로 삼는 것은 무의미하고 잔인하다는 것이다.
관련 링크
20240729/
조력사를 반대하는 자들의 고약한 점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막고 방해하는 것이면서 조력사를 위하는 사람들이나 인류를 위한 것처럼 포장한다는 것이다.
특히 의사, 종교인들이 그렇다.
물론 개인은 조력사를 원하더라도 사회 입장에서는 위협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다수의 개인이 원한다는 것은 사회가 원한다는 말도 된다.
어차피 개인의 자살을 막지 못한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조력사를 막아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자들은 너무 잔인하다.
20240809/
죽음은 나쁜게 아니다.
죽음이 쉬워진다거나 편해진다는게 나쁜게 아니라는 것이다.
내 목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부분이다.
그 누구도 죽고 싶은 사람을 강제로 살라고 할 권리는 없다.
의사가 자신의 신념 때문에 조력사에 도움을 주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반대하는 것은 정말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20240829/
정말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내가 자살을 할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난 이성적으로 자살하는게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난 자살희망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