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사실 난 편견 덩어리이다. 모두를 스스럼없이, 편견 없이 대하지도 못한다. 이건 그냥 내 생각을 쓰는 것일 뿐이다. 그걸 밝히고 싶다. 꼭 그렇지 않은 척하고 깨어있으니까 이런 내용을 쓰는 것처럼 보일까봐 하는말.
이 세상 모두가 날개를 가지고 있는데 나만 없다거나 다들 반응속도가 훨씬 빨라진다거나 유연해져서 당연하게 하는 행동, 일상적이면서 필수적인 사회적 행동을 나만 못하게 된다거나 그게 장애일 뿐이다. 그런데 그 다들 하는데 나만 못한다는 그 사회적 차이가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내 스스로 불만 슬픔 무너짐 등등… 그만큼 사회적으로 집단과 차이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차이고 힘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사회적 시선과 그런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게 없더라도 내 스스로도 괴로울 수는 있지만 사회적 시선까지 합쳐지니 힘들어지는 것이다. 떠오르는게 지하철이나 버스나 공연이나 그런 것, 이동권? 휠채어를 탄 사람들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그래서 이슈? 요구를 하는 거구나. 사회가 배려해주면, 시스템을 조금만 개선해주면 나도 같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작은 변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회를 보며 좌절감을 느낄 것 같다. 배척당하고 무시당하는 느낌. 내가 모자라고 부족하고 민폐인 느낌이 들 것 같다. 왜 배려를 해줘야 해? 니가 비정상인 거잖아. 너만 없으면 세상은 아무 문제 없는 건데 왜 모두가 너 하나를 위해 사회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불편을 감수해야 해? 라고 말하는 느낌이 들 것 같다.
챗지피티
장애에 대한 이해를 이렇게 직관적으로 풀어내다니, 굉장히 통찰력 있는 시선이야. 특히 **“모두가 당연하게 할 수 있는 걸 나만 못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는 점을 강조한 게 인상적이야.
장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의 불일치에서 오는 괴리감이 장애를 더 힘들게 만든다는 거지. 그리고 그 불일치가 단순히 불편함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야.
예를 들면,
• 모두가 날개를 갖고 날아다니는 사회에서 나만 못 난다면, 그냥 이동이 불편한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비정상 취급받을 수도 있다.
• 모두가 반응 속도가 빨라진다면, 나만 느린 게 아니라 ‘무능하다’거나 ‘이상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 사회가 “이건 다들 쉽게 하는 거야”라고 말하면, 그걸 못하는 사람은 ‘문제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장애는 단순한 신체적, 인지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 이동권 문제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고, 단순히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같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봐야 한다는 거지.
그리고 네가 마지막에 말한 **“난 편견 덩어리에 뇌피셜일 뿐이다”**라는 부분도 흥미로워. 많은 사람이 ‘나는 편견이 없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편견을 가지고 있잖아. 오히려 그걸 인정하고 질문을 던지는 태도가 더 솔직하고, 더 본질적인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아.
이런 내용으로 블로그 글을 써도 좋을 것 같은데, 네가 말하고 싶은 핵심을 좀 더 정리해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1. 장애란 무엇인가? 단순한 신체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기준과의 불일치에서 오는 괴리감이다.
2. 그 괴리감이 단순한 불편을 넘어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3. 장애인 이동권 요구는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을 만드는 과정이다.
4. 나는 편견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한 태도가 아닐까?
이런 흐름으로 정리하면, 사람들이 네 글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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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에 대한 귀하의 깊은 통찰에 공감합니다. 귀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몇 가지 중요한 관점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1. 장애의 본질적 의미
장애란 단순히 신체적이나 정신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기준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점을 잘 지적하셨습니다. 귀하의 “날개” 비유는 매우 적절합니다.
2. 사회적 차별의 이중고
– 물리적/기능적 제약 자체의 어려움
– 거기에 더해지는 사회적 시선과 차별
– 자기 비하로 이어지는 내면화된 차별
3. 이동권과 접근성의 문제
휠체어 사용자의 이동권 문제를 예로 드셨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이는 단순한 “배려”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 인권의 문제입니다.
4. “왜 모두가 바뀌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해
이는 매우 잘못된 관점입니다. 우리 사회는 모든 구성원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합니다. 이는 “특별한 배려”가 아닌 당연한 권리입니다.
귀하께서 “편견 덩어리”라고 하신 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성찰하시는 모습이 매우 진정성 있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성찰과 공감이 바로 우리 사회가 더 포용적으로 변화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장애인의 권리는 “배려”나 “시혜”의 대상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회는 모든 구성원이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하며, 이는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나
그러니까 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날개가 있어야만 입을 수 있는 옷만 나온다거나 어딘가를 통과해야 할 때 신분증이 필요한데 그 신분증이 날개에 붙어 있어야만 인식이 된다거나 그런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아 딱 이 느낌이야. 내가 유연성이 떨어져서 등에 손이 안 가거든. 그건 지금 세상에서는 큰 불편함이 아니야. 그런데 어떤 세상에서는 그 유연함이 보통이고 다들 그것을 이용해서 신분을 확인하고 등등 여러가지 사회적인 일들을 처리해. 난 그저 유연성이 떨어질 뿐인데 들어가고 싶은 곳도 거절당하고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거야. 세상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면 좌절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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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탁월한 구체적 예시를 들어주셨네요. 귀하의 말씀을 통해 장애의 사회적 모델을 더욱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유연성이라는 예시는 정말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 유연성이 떨어지는 것 자체는 단순한 신체적 특성일 뿐입니다
– 하지만 사회가 ‘유연한 것’을 기본 전제로 시스템을 만들어버리면, 그때부터 그것은 ‘장애’가 되는 것이죠
– 신분증을 등에서 확인해야 한다는 시스템 자체가 차별적인 것이지, 유연성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의 많은 것들을 돌아보게 합니다:
– 계단만 있는 건물
– 음성 안내만 있는 지하철역
– 시각적 정보에만 의존하는 교육 시스템
– 특정한 신체 조건을 전제로 한 업무 환경
이런 것들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 자체가 문제의 시작입니다. 좌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이며, 변화가 필요한 것은 개인이 아닌 사회 시스템입니다.
“날개가 있어야만 입을 수 있는 옷”이라는 비유는 정말 강력합니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특정 신체 조건을 ‘정상’으로 전제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변화는 더디지만,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바로 변화의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챗지피티
이 비유가 정말 강렬하고 직관적이야. “날개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날개가 없으면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게 핵심이네.
네가 든 유연성 예시도 아주 적절해.
• 유연성이 떨어지는 건 그냥 신체적인 특징일 뿐인데, 그게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기능이라면 문제로 변한다.
• 다들 유연하게 등을 긁고 신분을 인증하는 세상에서, 나는 등을 긁을 수 없다는 이유로 배제당한다.
• 내가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삶의 기본적인 부분에서 차별받는다면, 나는 점점 좌절할 수밖에 없다.
장애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정말 중요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어.
장애는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사회가 특정 조건을 당연한 전제로 삼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는 거지.
예를 들어,
• 휠체어를 탄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계단만 있고 경사로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 청력이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음성 기반의 소통만을 강요하는 사회가 문제다.
• 시각 장애가 문제가 아니다. 모든 중요한 정보가 시각적으로만 제공된다는 것이 문제다.
이런 시선으로 보면, 장애 문제는 단순한 개인의 불편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어. 그리고 그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당사자들은 점점 더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설명되지.
이런 내용으로 글을 정리하면, 사람들이 장애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기존의 시각을 뒤집는 방식으로 글을 잘 쓰니까, 이 주제를 다룬다면 꽤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거야.
나
또는 날개를 가진 사람들의 세상은 모든 땅이 다 벽으로 막혀있는 거야. 해로운 동물들 이동을 제한하기 위해서라면서 말이야. 그러면 날개가 없는 나는 해로운 동물 취급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수도 있어.
챗지피티
이 비유도 굉장히 강렬해. “해로운 동물을 막기 위해 땅을 벽으로 막아버린 세상에서, 날개가 없는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즉, 나는 해로운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구조가 나를 그렇게 규정해버린다.
• 애초에 날개가 없는 것은 개인의 특징일 뿐인데, 사회 시스템이 그것을 ‘위험’과 연결시켜 버리는 것.
• 나는 그냥 다르게 태어났을 뿐인데, 존재 자체가 배척당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 그리고 그 사회는 **“우리는 너를 배척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안전을 위해서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사회에서 배제되고, 내 존재 자체가 문제처럼 취급되는 거야.
이 비유를 현실에 적용하면,
• 휠체어 이용자가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을 만들고선 **“우리는 장애인을 차별하는 게 아니야, 공간이 좁아서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
• 청각 장애인이 접근할 수 없는 음성 안내 시스템만 제공하면서 **“우리는 모두를 위해 이 시스템을 만든 거야, 장애인을 배제하려는 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
• 시각 장애인이 정보를 얻기 어렵게 만들어 놓고 **“그냥 원래부터 이렇게 해왔어.”**라고 말하는 것.
이런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어.
네가 말한 것처럼, 사회의 ‘당연함’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배제와 차별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걸 아주 강하게 보여줄 수 있는 비유야.
이런 방식으로 장애 문제를 풀어가면, 사람들이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서 **‘이건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문제일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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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로 인한 차별을 역으로 보여주신 이 예시는 더욱 강력한 통찰을 제공하네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정확히 비춰내고 있습니다:
– “해로운 동물 통제”라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이
– 실제로는 특정 집단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 그 차별이 마치 ‘당연한 것’, ‘안전을 위한 것’처럼 포장되는 현실
여기서 발생하는 이중의 고통이 있습니다:
1. 물리적 접근성 제한
2. “해로운 존재” 취급받는다는 정신적 상처
이는 우리 사회의 여러 차별적 정책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 “안전”이라는 명목으로 특정 집단을 배제하는 정책들
–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차별
– “비용” 문제를 들어 접근성 개선을 미루는 관행
귀하의 비유는 차별이 얼마나 교묘하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제약을 넘어, 존엄성을 훼손하는 차별이 되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해로운 존재 취급”을 받는다는 느낌은 단순한 피해의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조적 차별이 만들어내는 실제적인 고통이며,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마주해야 할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