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컷읽기 – 나는 고유하지 않다, 죽음에 대해서

식물은 가지를 잘라서 번식할 수 있고 그것들은 모두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플라나리아도 그렇지.)
식물은 “고유한 단 하나의 나”라는 개념이 없다는 거야. (그렇게 인간과 너무나도 다른 개념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식물을 먹는게 죄책감이 덜한 것 같기도 해.)

인간은 다를까?
나는 내가 시간에 따라 분리된다고 생각해.
단 하나의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거야. (내가 절대적으로 고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 당장 이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고 자각하는 내 안의 존재 뿐이야.)

그런데 사실 나는 내가 시간에 따라 분리된다고 안 느끼잖아?
시간에 따라 분리된다는 것은 객관적인 관점이고, 단 하나의 내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주관적인 관점이야.
그저 관점이 다를 뿐, 둘다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후자의 관점에서는 죽음이 두려울 수밖에 없어.
고유한 내가 영원히 사라지는 거니까.
나는 죽는 순간의 두려움을 느끼기 싫어.
종교의 장점 중에 하나가 죽음의 두려움을 덜 느낄 수 있다는 부분 같아.
종교에서는 사후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니까.

하지만 나는 종교를 믿지 않고, 그들이 모인 천국이라는 곳에 가고 싶지도 않아.
나는 나만의 생각, 상상으로 죽음의 공포를 덜 느낄 거야.
앞으로 그런 이야기들을 해볼 생각이야.

뇌를 젊은 육체로 옮기거나 디지털 세상으로 이주하는 것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의 차이인 거야.
내가 그것이 의미있다고 여기면 진짜 내가 옮겨간 것이 되고, 의미가 없다고 여기면 그건 내가 아닌 거야.

앞에 얘기했듯이 내가 시간에 따라 분리된다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오래 사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
하지만 주관적 관점으로 보면 사후세계를 믿는 것처럼 죽음의 공포를 영원히 안 느낄 수 있어.

그런데 우주도 끝이 있을텐데 영생이 존재할 수 있을까?
죽음의 공포나 슬픔을 뒤로 미룰 뿐, 결국 언젠가는 느껴야 할 때가 와.
그래서 영생이나 냉동인간을 거부하고 인간다운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사람들의 말도 위선이나 솔직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아.

세브란스라는 드라마나 5억년버튼이라는 만화를 보면?

몇년전에 내가 쓴 일기를 보면 거의 기억이 안 나잖아.
꼭 다른 누군가가 쓴 일기를 보는 기분이 들기도 해.

그러니까 진짜로 나와 매우 비슷하지만 다른 존재였다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사실 나는 5분 전에 내가 뭘 했는지 생각하면 다른 존재처럼 멀게 느껴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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