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음이 덜 두려운 이유 + AI, 생명의 소중함, 인간도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mdge)

/20230221/
스웜프맨이라는게 있더라? 내가 생각한 것과 매우 비슷한 내용이다.

“나랑 똑같은 존재가 생겨났고 원래의 나는 죽었다면 과연 새로 생겨난 그것은 나인가?” 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여기서 “그것을 나라고 볼 수 있는가? 아닌가?”는 사실 중요한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핵심은 “나라는 존재는 과연 얼마나 분명한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 고민을 위해서 그런 가상의 상황을 상상하게 된 것이다. (스웜프맨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런 이유 때문에 그것과 비슷한 것을 고민했던 것이다.)

내가 지금 내린 결론은 “인간은 그만큼 불완전한 존재라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조차 없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변에서 어떻게 보든지 그것은 중요한게 아니고, 오로지 나의 관점으로 봤을 때 나라는 존재는 얼마나 분명하게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나는 증명할 증거나 근거가 하나도 없다.

그저 내 뇌가 “나는 분명히 존재해”라고 속이는 것에 내가 속아넘어갔을 뿐이다.

/20221111/

인간과 소통이 가능한 AI가 나왔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나는 인간이 그것을 AI라고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짜 지적 생명체와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댓글에는 AI의 원리를 생각하면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 수 있을 거라는 내용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다.

사실 이미지를 생성하는 AI도 그렇지 않은가? 그냥 수많은 이미지를 받아서 조합하고 편집할 뿐이다.

그 중에서 인간이 의미있게 받아들일만한 이미지만을 뽑아내라고 명령하는 것 아닌가? 그런 이미지 생성 AI를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최근에 식물을 키우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식물도, 다른 동물도, 인간도 사실은 별것 아니고 단순한 프로그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나는 파 밑부분을 잘라서 흙에 심어서 키우고 있다. 식물등도 하나 구매했다.

전에는 다육이고 뭐고 다 죽였는데, 이번에는 나름 신경을 써서 그런지 너무 잘 자란다.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자라는 파를 볼때마다 기분이 좋다. 그런데 그 파를 보면서 참 생명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그냥 파가 자라는데 필요한 조건만 맞춰주면 잘 자라는 거잖아. 프로그램에 온전한 값을 넣어주면 온전한 값을 내어주는 것과 뭐가 다르지?

동물이나 인간은 또 뭐가 다를까? 적당한 온도와 음식, 그리고 여가생활이나 심리적인 부분도 사실 그렇게 복잡할 것도 없지 않나?

그러니까 대화가 가능한 AI도 결국 오래전에 유행했던 “심심이”와 크게 다를바가 없지만, 더 방대한 자료를 통해서 더 디테일해졌다는 것만으로도 더 인간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또한 지금의 AI의 가장 큰 문제는 그저 계산기 수준일 뿐이라는 것이다. 계산기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대단한 자료를 내놓기는 하지만 결국 인간이 원하는 정보를 넣어서 그것들을 통해서 원하는 정보를 내놓는다는 것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나중에 인간이 말로, 대화로 설명을 해서 그것을 AI가 알아듣고 배우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면 정말 인간에 훨씬 더 근접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실 인간도 복잡하긴 하지만(복잡하다는 것도 인간의 기준에서 미화하고 과장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특정한 조건만 맞춰주면 잘 성장하게 되고, 인간의 삶 역시 특정 조건만 맞춰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고 별것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슬픔이나 고통이나 그런 감정이나 감각들도 사실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추가된 기능일 뿐이라는 것이다. 슬픔을 느껴야 다른 사람과 화합해서 살아가기 적합하고, 고통을 느껴서 발버둥쳐야 생존에 유리할테니까.

정리하면 AI가 사람과 대화하는 원리가 단순하고 뻔히 보이더라도 인간과 구분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생명으로 볼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인간이나 생명도 사실 프로그램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수도 있고 말이다.

.

.

약간 다른 이야기인데 이어 붙여보자면, 그래서 생명이라는 것은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니기도 한 것 같다.

“나”라는 존재는 두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이 세상에 유일한 하나의 소중한 존재로 볼수도 있고, 아무 의미 없는 우주에서 먼지보다도 못한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것”으로 볼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순간에는 최대한 주관적으로 모든 것을 바라봐서 나의 삶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서 내가 행복을 느끼고 편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하고, 죽음에 대해서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봐서 나의 삶, 지구, 우주조차도 사실 아무 의미가 없으니 내가 죽는 것조차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그게 내가 행복하고 편하고 받아들이기 편한 관점이니까.)

.

.

살아있는 물고기를 회로 먹고, 살아있는 문어를 뜨거운 물에 넣어서 죽이고… 이런 것이 나는 불편하다.

나를 프로불편러라고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의 그 불편함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피를 반대하는 운동이 과연 잘못된 것이기만 할까? 품질이 좋은 모피를 얻기 위해서 살아있는 동물의 가죽을 벗겨내는 것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만약 그것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인간, 사람의 고통은 또 뭐가 문제가 될까? 나만 아니면 무슨 고통을 받든 아무 상관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이고 그것도 문제가 없다면 없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너무 불편하게 살지 말자는 말도 맞는 말이다. 채소나 과일도 생명인데 그런 것도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굶어 죽고 말 것이다.

또한 모든 식물을 생으로 먹지 말고 다 고통 없이 빨리 죽여서 먹는다는 것도 너무 과하고 이상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나중에 정말 식물도 공포와 고통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 식물을 고통 없이 죽이는 기계도 나올 수 있고, 잘 팔릴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사실 완벽하고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나도 다른 생명을 죽이고 먹으면서 어떻게 남한테 야만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고 먹지 않거나 최대한 고통 없이 죽이려고 노력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이유는, 우리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위에 얘기했듯이 인간도 어떻게 보면 단순한 프로그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생명체이고 동물이고 인간이다.

내가 생명이고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내가 존중받기 위해서라도 다른 생명을 덜 죽이고 죽이더라도 고통을 덜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를 존중해야 하는 존재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 기준이 다를 수 있지만, 존중하려는 노력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만 안 고통 받으면 되고 내가 맛있게 먹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그것이 긍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너무 불편한 것이 많고, 다른 생명이 죽는 것이 불편하다고 다른 인간을 공격하는 것도 역시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

내가 다른 생명도 최대한 배려하려는 이유도 결국은 내가 배려받고 존중받고 싶어서이고, 내가 불편하고 싶지 않아서이며, 내가 내 스스로를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싶어서이다. 그것도 결국은 내 욕심이고 이기적인 것이라고 할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그런 기준과 생각이 잘못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고, 인간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내 생각이나 기준의 방향으로 가는게 맞지 않겠냐는 것이다.

다른 생명의 죽음이나 고통에 대해서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것도 소중하게 보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서 너무 극단적이고 잘못된 주장이나 행동이 나온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겠지만, 그런 생각이나 의식이나 노력 자체가 오버를 떤다거나 불편충이라는 식으로 비하받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이것도 개고기랑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라기보다는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이 더 다수가 돼서 어떤 법이 만들어지냐의 문제일 뿐이다. (사실 옳고 그름도 명확한 것은 없긴 하지. 결국 사회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까.)

유난떠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인류는 그런 방향으로 계속 이어져왔고 지금도 가고 있다. 인공 고기를 개발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것은 환경과 연관이 큰 것도 같다. 전쟁이 나고 재앙이 닥쳐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면 동물이고 식물이고 다른 생명의 고통 같은 것을 신경쓸 겨를도 없을 것이고, 점점 더 문명이 발달하고 먹고 살기 편해지면 편해질수록 다른 생명의 고통에 대해서도 민감해지겠지.

.

.

우리가 식물보다 동물에 더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우리가 동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똑같이 빨간 피를 흘리고 소리내어 우는 동물에게 더 감정을 이입하기 쉬울 수밖에 없다.

또한 인간의 입장에서 식물은 무엇을 생명이라고 볼 것인지도 모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열매를 생명으로 볼 것인가? 나무 기둥? 뿌리? 씨앗?

어쨌든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그저 인간 입장에서 다른 인간이나 동물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쉽고, 그래서 그들이 나처럼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식물에 감정이입을 한다고 잘못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나 뿐만이 아닌 우리를 생각한다는 마음일 것이다.

물론 그것도 절대적으로 모두를 다 위하고 책임질수는 없다. 하지만 선별적이라고 해서 위선일 뿐이니까 애초에 불필요하고 아무것도 위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군가는 인간만이 존중의 대상일 수 있고 누군가는 인간도 존중의 대상이 아니고 자기 자신만일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자기 자신과 동물만이 존중의 대상일 수도 있다.

그것을 틀렸다거나 잘못됐다고 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의 안전과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는 다른 인간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은 문제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220602/

간단히 말하면 이런 것이다.

죽음은 별것 아닐 수도 있다. 그저 내일이 없는 것일 뿐이다.

내일이 없는 것이 왜 별것 아니냐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원래 나는 매일 죽는다. 오늘의 나는 죽고 내일의 나는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내일이 없는 것은 별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
.
.

사실 나는 매 순간 죽는다고 생각한다.

아주 짧은 순간에도 의식은 끊어지게 마련이다.

의식이 온전히 이어지지 않으면 방금전의 내가 죽고 기억을 이어받은 내 복제인간이 나인 것처럼 행동해도 다를 것이 전혀 없다.

그래서 나는 영원한 삶도 그저 기억을 이어가는 것일 뿐이기에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앞에 말한 불완전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내 삶이 소중하고, 죽음이 두렵고, 영원한 삶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과 객관적인 관점 두가지 시선으로 죽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
.

(이전 글)

나는 죽는게 무서웠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게 아닐까? 정확한 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내가 죽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덜 두렵게 생각할 수 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보려고 한다.

죽는게 두려웠던 이유는 내가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 생각도 못하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지금의 나는 이 세상을 느끼고 생각하며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데, 확실히 살아가던 내가 그 삶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지금 분명히 존재하고 내가 현실을 분명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어쩌면 확실한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존재나 나의 삶 자체가 애초에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것이었다면 죽음이라는 것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내가 어떤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실에 누워 있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수면 마취가 돼서

점점 정신을 잃게 된다.

수술이 끝나고

나는 눈을 떳다.

수술실에 누워있던 나와 깨어난 지금의 나는 정말 동일할까?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비슷한 또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나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다.

그런데 정부의 비밀요원, 또는 외계인이

나를 납치해서

구덩이에 버린다.

아 잘 잤다~

그리고 나의 기억까지 완벽하게 복제한 복제인간을 내 방에 놔둔다면?
진짜 나는 누구일까?

이번에는 그들이 조금 더 과감하게 5분에 한 번씩 나를 납치한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아무것도 못하고 납치를 당하는 순간 완벽하게 복제된 나로 계속 교체해주는 것이다.

나는 현실에서 이런 일이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고, 내가 정말 고유한 하나의 존재이며 온전히 계속 살아가고 있다고 증명할 수 있을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의식은 계속 끊어지고, 분리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의식이 필름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분리된 한장 한장의 사진일 뿐인데 빠르게 다음 사진을 보여주면 사진이 움직인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인간의 의식도 사실은 아주 짧은 순간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이어진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5분 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려보자. 5분 전을 정확하게 기억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지는 중요한게 아니다. 5분 전을 떠올리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5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의식이 분리되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리고 의식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고 착각하게 되는 또다른 이유는 방금 전에 내가 했던 일을 내가 확실하고 완벽하게 기억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여러개의 공에는 1과 2가 적혀있을 뿐인 로또 기계가 있다. 나는 거기서 나오는 숫자를 받아서 기억해야 한다.

이 공은 1분에 한 개씩 나온다.

그러면 하루에 약 천개의 숫자를 외워야 한다. 이것이 가능한 사람은 몇명이나 있을까? 또한 단 하루가 아니고 일주일, 한달, 1년 동안 나오는 숫자를 전부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할까?

나는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양에 대해서 말하려는게 아니다. 내가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서 정확하게 무엇을 보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기억해낼 수 있다면 지극히 단순한 숫자 1과 2 중에 어떤 숫자를 받았는지는 아주 쉽게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가 과거를 아주 자세하고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단순한 부분은 확실하게 기억한다는 것조차도 어쩌면 착각이나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의식도 매 순간마다 끊어지고, 그것을 이어진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기억조차도 너무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1분마다 납치를 당해도 스스로 알아챌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내가 1분마다 죽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현실에서의 죽음이란 단지 더이상 복제인간이 복제되지 않을 뿐인 것이다.

만약 아인슈타인을 과학기술로 되살린다면 인류에게 정말 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정말 기대된다.) 되살아난 아인슈타인도 현재의 과학기술에서 자신의 천재성을 더 신나게 발휘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과거에 죽은 아인슈타인에게 되살아난 아인슈타인은 어떤 의미일까?

이런식으로 생각하면 영생은 큰 의미가 없다. 복제인간으로 교체되는 것이 영원히 이어질 뿐, 내가 매 순간 의식이 끊어지고 분리되는 것 자체는 변하지 않으니까. (물론 우리의 삶 자체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영생은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

어쩌면 영생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주관적인 관점에서의 삶은 너무나도 불완전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는지가 더 가치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좋은 책을 남기거나 위대한 업적을 남겨서 내가 죽은 후에도 내가 했던 주장이나 생각, 또는 나의 이름과 업적을 세상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억해주는 것이 더 영생에 근접하는게 아닐까? (물론 그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겠지만…)

이런식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의 나와 내일의 나는 둘다 내가 맞지만 지금의 나와 내일의 나는 다르다.

결국 이런 생각의 핵심은 인간이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 흐르는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말이다. 그저 짧은 순간을 인식하고 불완전하게 기억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애초부터 완벽하게 제어할 수가 없다. 그저 우리의 뇌가 우리가 분명하고 온전하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삶이 의미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과거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고, 기억도 불완전하지만 매 순간은 그 순간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순간은 그 시간 속에 영원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매 순간을 너무 불행하지 않게,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같다.

This entry was posted in 철학, 사회 and tagged , , , , . Bookmark the permalink.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