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선택과 진화, 그리고 자살, 외모지상주의, 국가경쟁력

위 영상을 간단히 설명하면 “진화라는 것은 돌연변이를 통한 자연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기린의 목이 계속 길어진 것은 기린들이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거나 원했기 때문이 아니고, 단지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높은 곳의 먹이를 먹을 수 있는 조금이라도 목이 더 긴 기린들만 살아남았고 그 자손들도 목이 길 확률이 높기 때문에 점점 더 길어졌다는 것이다.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모든 생명은 어떻게든 살아남고 자신의 자손을 퍼트려서 멸종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기본적인 본능이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영상을 보면서 자연선택이라는 것을 생각하다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본능이나 욕구나 공포와 같은 감정까지도 자연선택에 의한 결과인게 아닐까?

먹고자 하는 욕구가 없어 굶어죽고, 포식자나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게 아니고 애초에 도망친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경우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공포를 느끼고 도망치려고 하고, 배고픔을 느끼고 음식을 먹으려고 하고, 성욕을 느끼고 종족을 번식하려고 하고… 그것이 처음부터 타고난 생명의 목표가 아니었고, 단지 그런 식으로 느끼고 생갂하고 행동한 생명체들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그렇지 않은 생명체들은 다 죽은 것이고 말이다.

한가지 예를 더 들자면 바퀴벌레를 보면 위협적인 독침이나 강력한 턱이나 무기 같은 것은 없지만 엄청난 번식력으로 번성하고 있다. 바퀴벌레가 원래 그런 특성이었던게 아니고, 독이나 무기나 등등의 수많은 특성을 가진 바퀴벌레 중에서 현재의 바퀴벌레의 생존 방식이 지구에서 가장 살아남기 적합했기 때문에 현재 우리고 알고 있는 바퀴벌레들만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도 든다. 다른 생명의 죽음이나 고통을 보며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끼는 것도 그것이 당연한 감정이 아니고 인간끼리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생존에 유리하고, 그 방식에 필요한 조건 중에 하나가 그런 감정이었던게 아닐까?

그러니까 생존을 위해 모든 생명들이 치열하게 살고 있다거나, 인간의 감정, 본능, 욕구 등등… 지금까지 당연하고 원래 그랬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자연선택 때문에 생겨난 것이고 자연선택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네 타는 알고리즘

난 예전에는 위 영상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저렇게 할 필요가 있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저 무식해보이는 방법이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생존 방식이고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 같다. 영상에서 그네를 타는 것 같은 느낌이 나지 않는 경우들은 제거되었듯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생명들보다 훨씬 많은 생명들이 자연선택에 의해서 멸종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멸종이라는 것이 그렇게 나쁜게 아닌 것 같다. 그냥 자연스러운 자연현상이나 진화의 과정일 뿐이다. 단지 어떤 동물이나 식물이 멸종했을 때 그 영향으로 인간들에게 큰 피해가 올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 멸종을 막거나 제어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것일 뿐이다.

자살

자살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도 잘못된 것 같다. 자살을 막을 때 “원래 인간은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잘못된 것이고 비겁하고 나약한 것이다.” 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살하려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해야 할 행동은 두가지 뿐이다. 내버려두거나, 그들이 살만하도록 돕고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살을 막는 것이 자신들의 손해나 이익과는 전혀 상관없이, 생명을 살리거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식의 인간적인 도리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처럼 교화하려고 들고, 훈계하고 잔소리하고, 가족에게 상처를 준다며 협박하고, 지옥 간다며 겁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사실 그런 방식은 효과적이지도 않고 맞는 말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더 실리적으로 바라봐야만 그들을 돕거나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자살하려는 사람을 살고 싶도록 만들려면 충분한 이유가 필요하고,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만 정말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해결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자살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너무 막연하고 잘못되어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살률이 줄어들고 있지도 않고, 오히려 자살하려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사회에서 고립시켜서 자살을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다시 말해서 자살을 당사자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그 당사자의 관점이고, 그것을 막을지 말지, 도울지 말지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머지 인간들이 선택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사자의 심정에 대해서는 1도 생각할 필요가 없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서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고,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만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자살하려고 든다는 것은 결국 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살기 힘든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당장 나는 그것을 못 느끼더라도 내가 그렇게 느낄 날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때가서 내가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도 내가 지금 그들을 도우려고 노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자살을 막기 위해서는 더 실질적인 해결 방안을 고민해야 하고 나 자신이나 사회에 그것이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교화나 훈계나 잔소리나 협박 같은 현재의 자살을 막는 방법들은 결과적으로 자살을 막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어쩌면 자살하려는 당사자들에게 자살이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문제의 해결책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앞에 말한 기존의 교화, 훈계, 잔소리, 협박 같은 것들은 너무나도 막연하고 안일했다는 것이다. 나뭇가지 위에 감이 스스로 떨어지길 바라며 쳐다보는 것처럼 말이다.

정리하면 자살이라는 것도 결국 자연선택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죽고 나머지 어떤 사람들이 살아남고 종을 퍼트리겠지. 하지만 이것이 과연 인류에게 이상적인 방향인지는 고민해야 할것이다. 개개인이 불행하고 인류가 쇠퇴하는 방향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인류 자체가 자연선택에 의해 멸종되는 방향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류의 큰 피해와 멸종을 막기 위해서 다른 동식물의 멸종을 우려하고 관리하는 것처럼 이제는 자살에 대해서 더 적극적인 해결책을 고민해야 하는게 아닐까?

외모지상주의?

어릴 때 어떤 방송에서 침팬지였나? 원숭이였나? 그런 동물들도 여성의 외모를 구별하는지 실험하는 내용을 본 기억이 있다. 방송 내용으로는 예쁜 여성에게 더 호감을 가졌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위험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 동물들과 인간 사이에 어떤 우연적인 접점이 있었을 뿐인데 어떤 절대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가 정해져있기라도 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잘생긴 외모라는 것은 결국 수많은 돌연변이, 변종 중에서 다수에게 보편적으로 호감을 얻는 외모일 뿐이다. 그 외모라는 가치가 가장 중요하고 전부나 마찬가지라고 보는 것이 외모지상주의이고 거기에 빠지면 외모에 예쁘고 잘생기면 다른 부분까지 우월할 거라는 환상을 가지게 되고 착각을 하게 된다.

물론 외모는 분명히 강력한 가치가 있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외모를 보면 쉽고 빠르게 호감을 가지고 빠져들게 된다. 그것을 부정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생겼다는 것이 타고난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잘생기고 예쁘다는 외모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육

교육이나 체계적 훈련, 가장 효과적이고 최적화된 방향을 추구하는 것도 분명히 인류의 발전에 큰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특성은 돌연변이처럼 다양성, 창의성이라는 부분을 축소시키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체계적인 교육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은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행복이나 인권의 문제가 아니고, 세계 경쟁력에 대한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돌연변이 없이 똑같은 유전자만 복제해서 하나의 병만 돌아도 멸종 위기에 처하는 바나나처럼 한국 사회도 하나의 가치만을 추구하다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거나 멸종할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쳐도 결국 자연선택에 의해 어떤 동물은 죽고, 또 어떤 동물은 살아남듯이 어쩌면 의지, 노력, 암기 같은 것보다는 다양성, 개개인의 개성을 살리는 것이 성공이나 생존의 열쇠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을 포기하거나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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