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육식이 불편한 이유는 그것 때문일까?

나는 유튜브의 농사, 농부에 대한 영상을 즐겨 본다.

우선 드는 생각은 결국 먹으려고 키우는 거면서 자식처럼 키웠다고 표현하는 것은 뭔가 위선적이라고 생각해서 싫어한다.

너무 단순한 관점일지 모르지만, 누가 자식을 먹어… 자식을 키우듯이 열심히, 정성들여 키웠다는 그 표현을 어느정도 이해하면서도, 자식이라는 표현은 뭔가 거북하다.

그리고 농부 중에서 소를 키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바로 꺼버린다. 소가 어느정도 크면 끌려갈 거잖아. 그 상황이 상상되니까 불편하다.

.

.

어쨌든 나도 집에서 화분에 식물을 키워보고 있고, 키워서 먹어 보기도 한다. 난 식물도 처음에는 뭔가 불편하고 미안했다.

되도록 고통 없이 빨리 죽여야겠다는 생각도 했었고, 먹기 미안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귀찮음 때문에 무뎌진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식물이 고통을 알겠냐고 할수도 있는데 식물도 자신을 아프게 했던 사람이 근처에 오면 반응을 한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다. (그냥 내 뇌에서 만들어낸 건가?)

아주 단순한 예를 들면 만지면 반응을 하고 움직이는 식물도 있다. 그것을 감정 같은게 아니고 무조건 반사? 그냥 기계적으로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 자연 선택 진화를 생각해보면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고통 공포 두려움도 어떻게 보면 그냥 원래 그렇게 반응하게 설계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반응을 하고 느낀다고 생각해서 소리를 내고 도망치는 종이 살아남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다수가 느끼니까 그게 진짜 감정이라고 착각할 뿐이라고 볼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기계전인 반응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나?

인간이 아닌 입장에서는 인간의 통증이나 감정을 기계적인 반응이라고 볼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나 다름 없다.

.

.

어쩌다가 또 이렇게 구구절절 쓰게 됐는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주 단순하다.

어차피 내가 생명을 유지하려면 다른 생명을 먹어야만 하니까 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다른 생명을 죽이거나 죽이는 것에 가담해야만 한다. 그러면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은 크게 나눠서 동물과 식물이다.

그리고 나는 동물이다. 또한 고통을 느낀다.

그러면 소나 돼지나 닭도 죽기 전에 공포를 느끼고, 죽는 순간에 고통을 느낄 것을 상상하게 된다. 그게 불편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완벽한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최대한 자제하려고 노력할 뿐…)

앞에 말했듯이 식물도 생명이지만… 내가 동물인게 핵심인 것 같다. 동물한테 더 감정이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식물은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코이고 어디가 입인지, 모르고 동물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빨간 피를 흘리지도 않는다. 식물의 고통과 공포에 감정이입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덜 불편한 식물의 죽음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너무 뻔한 얘기를 구구절절 얘기하는 건가?)

정리하면 내가 생명이고 그래서 다른 생명도 최대한 존중하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먹고는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동물이니까 같은 동물에게 더 감정이입을 하기 쉽기 때문에 되도록 먹지 않으려고 든다는 것이다.

식물이 동물보다 덜 소중하거나 지능이 낮거나 해서가 아니고(가만히 있는 애들한테 인간 기준의 지능을 따지는 것도 말이 안 되겠지.) 그저 인간에게 개나 돼지나 소나 고양이가 식물보다 훨씬 가깝기 때문에 감정이입이나 불편함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

.

예전에는 “정자나 그런 작은 것들도 다 생명 아닌가?” 의문을 가졌었다. 그런데 그런식으로 눈에 안 보이는 작은 것들까지 신경쓰면 나는 함부로 땅을 밟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작은 생명체들의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인간의 죽음도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다. 우주에서 보면 인간도 미생물로 여겨질 수 있고, 100년도 찰나일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육식을 안 하려고 하는 이유는 내가 감정이 있고 고통을 느끼니까. 내가 몰입할 수 있는 동물은 안 먹음으로써 내가 불편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이라고 할수도 있다.

누군가는 동물을 먹는 것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수도 있고, 자신이 외계인에게 먹힌다면 그것도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어차피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 상관없이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기도 하고…)

하지만 동물을 덜 죽이고 덜 고통스럽게 하려는 것에는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도 크다.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나와 비슷하거나 감정이입할 수 있는 것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세상이 그런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면, 나도 덜 고통받으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적인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보면 참견이라고 할수도 있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할수도 있다. 나도 이 세상은 아무리 완벽한 사회로 만들어져도 약육강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뭐가 옳다 그르다라기보다는 무엇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느냐의 차이인 것 같다.

하지만 결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채식이 더 우위에 설거라고 생각한다. 결국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더 사회를, 전체를 위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육식을 금지하게 될것이라거나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점점 더 넓은 대상의 고통을 없애거나 줄이는 쪽으로 가지 않을까?

This entry was posted in 잡담, 철학, 사회 and tagged , . Bookmark the permalink.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