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채플에서 느낀 의문: 신앙과 욕심은 공존할 수 있는가?
대학교 시절, 나는 기독교(개신교) 계열 대학에 다녔다. 학교의 특성상 채플이 의무적인 과정으로 포함되어 있었고, 나는 그것을 통해 기독교를 더 깊이 이해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채플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성공과 신앙: 신은 도구가 아닌가?
채플에서 연설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신을 믿었더니 일이 잘 풀리고 성공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의문이 들었다. 과연 신이라는 존재가 그들에게 단순히 인간의 욕심을 충족해주는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신앙이란 인간의 이기심을 넘어서는 더 큰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연설자들은 신앙의 가치를 성공, 부와 같은 세속적인 결과에 연결 지으며 설득하려 했다. 그 순간, 나는 신앙이란 무엇이며, 신이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신의 공평성: 인간계를 초월해야 하는 존재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신은 모든 인간과 생명에게 공평해야 한다. 그런 신은 인간계에 나타나 특정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거나, 누군가를 편애하고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이 아니다.
특정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은혜”라는 개념이 너무나도 인간 중심적이고 배타적으로 느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 사람이 신을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더 나은 삶을 살게 되고, 믿지 않는 사람은 소외된다는 논리는 나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개신교의 설득 방식: 집단으로의 동원인가?
특히 개신교에서 자주 들었던 말들은 나를 더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 “믿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
- “신을 믿으면 죄가 사라지고 인생이 잘 풀린다.”
- “믿으면 돈도 벌고 행복해질 수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내가 보기에는 종교라기보다는 보험 상품 같았다. “신을 믿어야 한다”는 주장을 마치 조건부 계약처럼 들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신앙은 내 욕심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인가?
정말 신이 특정 집단의 신앙을 이용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그들을 통해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차별한다면, 과연 우리는 그 존재를 ‘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신앙이란 인간의 욕망과 조건에서 벗어나, 본질적으로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여야 한다.
하지만 개신교에서 보여준 모습은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다.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공포심을 조장하고, 조건부 혜택을 약속하며, 믿지 않으면 불이익이 따를 것이라는 논리를 펼치는 모습은 내가 기대했던 신앙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론: 신앙의 본질을 돌아보며
채플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은 나에게 큰 의문을 남겼다. 과연 신앙은 인간의 욕심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하는가? 신이라는 존재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인간의 세속적인 기준을 초월하는 공평한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종교가 본래의 가르침과는 달리 사람들을 동원하거나, 욕심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되는 것은 큰 문제다. 우리가 믿는 신앙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이 인간의 이기심과 조건을 넘어서는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이 글을 통해 독자 여러분도 한 번쯤 신앙의 본질에 대해 고민해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