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가진 아이와 부모의 선택: 사회가 가져야 할 책임과 시선
최근 한 뉴스 영상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부모가 장애를 가진 아이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댓글에서는 안락사와 존엄사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는데, 의문이 들었습니다. 대체 누굴 안락사 또는 존엄사 시켜달라는 이야기일까요? 부모를? 아니면 아이를?
아이는 무슨 죄인가? – 시선의 차이
비슷한 사건에서 아이가 장애를 가졌는지 여부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은 극명히 갈립니다. 아이가 장애가 없을 경우,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는 반응이 주를 이루지만, 장애가 있다면 “혼자 생존하기 힘드니 이해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릅니다. 장애가 있는 아이는 생존에 있어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부모가 아이의 생명을 동의 없이 데려갔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이가 장애가 있다고 해서 그 생명을 좌지우지할 권리가 생기는 걸까요? 장애를 가진 아이가 부모의 선택으로 생명을 잃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그 목소리들이 때로는 무섭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들은 정말로 그것이 상식적이고 옳다고 믿는 것일까요?
부모의 권리와 아이의 생명: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이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관점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아이의 생명을 결정할 수 있다’거나, ‘그럴 수 없다’는 명확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이는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아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장애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저 역시 장애나 질병에 대해 깊은 통찰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죽어도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면, 이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죽음을 원하지 않는 이들에게 “몸이 불편하니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하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고 소름 끼칩니다.
사회란 무엇인가?
사회는 무엇일까요? 서로 돕는 시스템 아닐까요?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도움만 받는 존재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장애가 있더라도 사회에 엄청난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장애를 가진 위대한 인물들은 많았습니다. 천재 과학자 스티븐 호킹처럼 말이죠.
일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 아닌가요?” 하지만 사회에 큰 공헌을 하는 사람 자체가 극소수입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들, 혹은 복지 혜택을 받는 다수의 사람들은 죽어도 괜찮다는 결론이 될까요? 이는 매우 위험한 논리입니다.
장애와 죽음의 선을 누가 정할 수 있는가
장애는 어디까지가 죽어도 괜찮고, 어디까지가 죽으면 안 되는 기준을 누가 정할 수 있습니까? 이는 인간이 함부로 정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우리는 장애가 있더라도 그 사람의 삶의 가치와 존엄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사회의 자산이다
저는 모든 사람이 사회의 중요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가 있더라도 사회에 크게 기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인간적인 관점을 넘어서,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정말로 나라에 돈이 없어서 지원할 수 없다면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도울 수 있다면, 사회는 그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사회를 위하는 길이고, 사회의 이익을 위한 길입니다.
결론: 장애와 존엄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책임
사회는 구성원 개개인의 존엄성을 지켜야 합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든 아니든,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기준을 쉽게 정해서는 안 됩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도,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중요한 재산으로 봐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그 누구도 “혼자 생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생명을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우리의 시선이 사회를 정의합니다. 우리가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더욱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