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고 존중은 이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나와 다른 남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이, 얼핏 듣기엔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 숨은 전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면, 때로는 그 이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은 결국, 그 사람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기준으로 삼아, 내 기준 안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까요? 아니면 나와 다른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더 중요한 걸까요?


이해와 존중은 다르다

나와 다른 사람이나 취향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름을 강요하거나 규정짓지 않는 태도입니다. 가령, 내가 게이라는 성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을 사회적 문제로 삼아야 한다거나, 내 기준으로 틀렸다고 단정 짓는 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그저 “나와 다른 존재가 있구나”라고 인정하고 지나갈 수 있는 여유와 존중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의 이해 강박과 그 문제

한국 사회에서는 종종 “이해”라는 단어가 다름을 수용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보다는, 다수의 기준에 맞추라는 압박으로 읽힐 때가 많습니다. “남을 이해한다”는 말을 핑계로 상대를 평가하고, 나와 다르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며, 교정하려 드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는 남을 돕기보다는 간섭하고 통제하려는 태도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진정한 이해란 타인을 나와 같은 틀에 맞추려는 노력이 아니라, 새로운 시선과 관점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해하려는 노력은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짓는 수단으로 사용되며, 이는 갈등과 대립을 초래합니다.


이해하려 하기보다, 그냥 지나가는 용기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나와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굳이 나의 기준으로 평가하거나 그것을 바꾸려는 시도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나 외계 생명체를 만난다고 상상해봅시다. 낯선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느꼈다고 해서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거나 공격하려고 드는 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낯선 존재와 공존하려는 태도이며, 그들을 억지로 나의 기준에 맞추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존중은 간섭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은 언뜻 긍정적으로 들리지만, 때로는 “나는 너를 평가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진정한 존중은 나와 다른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의 기준에 끼워 맞추려 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에도 나름의 이유와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굳이 그것을 문제 삼으려 하지 않는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 다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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