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력사를 반대하는 논리가 역겨운 이유

버튼 눌러 스스로 사망? 영국 조력사망 투표에 두 쪽으로 갈렸다 (해담경제연구소 어예진 소장)

조력사, 왜 반드시 필요할까?

조력사(Assisted Dying)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중요한 복지 제도다. 그런데 왜 이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걸까? 지금껏 고통받던 환자들에게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갑작스레 “도우미 시스템부터 도입해야 한다”며 반대하는 모습은 과연 진정성 있는 태도일까? 아니면 그저 막연한 반대일까?


독선적 반대의 문제점

지금 조력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본능적인 1차원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람이 죽는 건 나쁜 거야”라는 단순한 논리로 접근하면서, 실제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느끼는 절박함이나 존엄한 선택의 의미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 것 같다.

당사자들의 선택을 가볍게 보는 태도

조력사를 요청하는 당사자들이 단순히 생각 없이 죽고 싶어할 것 같나? 그들은 오랜 고통 끝에 자신의 삶과 죽음을 깊이 고민한 끝에 내린 선택이다. 그런데 이를 단순히 “생명을 경시한다”는 논리로 치부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을 과소평가하는 태도이다.


“완충장치 도입 후”라는 핑계는 위선적이다

조력사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일부 반대론자들은 “완충장치—즉,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복지나 시스템—를 먼저 마련한 뒤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겉보기에는 그럴싸한 논리처럼 보이지만, 이는 지금까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던 무관심의 연속선상에 있는 위선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도와주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완충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모습은 가식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조력사 도입이 계속 미뤄지면, 지금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은 기약 없이 계속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한다. 그들의 “알량한 양심” 때문에 말이다.


조력사를 둘러싼 비현실적 우려

조력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조력사가 도입되면 죽음을 강요받는 상황이 생길 것이다”,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죽음을 강요받을까봐?

조력사가 오히려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도 크다. 예를 들어, 조력사를 통해 아픈 사람들이 줄어들면, 남는 자원으로 살고 싶은 환자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죽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작용? 깊게 생각해봤나?

조력사는 고통받는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생명이 죽는 건 나쁜 거야”라는 막연한 감정론으로 부작용을 논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면, 그저 입을 닫는 것이 낫지 않을까?


조력사는 사회적 배려다

조력사는 단순히 죽음을 돕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살을 선택해야만 했던 사람들이 최소한의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사회가 배려하는 제도이다. 이런 제도를 반대하는 이유는 환자의 생명과 인권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 시스템의 유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본다.

돈과 부담에 대해 솔직해지자

반대론자들은 “돈이 없어서 눈치 보며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의사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에게 저렴하게 치료를 제공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자의가 아니니 조력사는 허용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댄다. 결국, 그들의 주장은 현실적이지 않은 위선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폭넓은 조력사 도입이 필요한 이유

조력사는 단순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제도일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도구이다. 폭넓은 조력사 제도는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더 존중하고,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현재 상태가 더 잔인하다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에게 조력사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다. 이는 그저 무기력하게 고통 속에서 살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조력사 제도를 반대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성을 부정하는 태도이다.


의사와 종교계, 조력사에 대한 목소리를 멈춰야 한다

의사는 개개인이 조력사를 시행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조력사 자체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본다. 이는 개인적인 신념의 문제일 뿐, 조력사라는 제도의 필요성을 논의하는 공론장에서 의사가 이를 저지하려는 행위는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난 태도다.

종교계는 더욱더 조력사와 무관한 집단이다. 종교적 신념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는 없다. 그들이 주장하는 가치관이 조력사의 합법화를 가로막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조력사, 먼저 합법화되고 보완책을 논의해야

조력사를 합법화하는 데 있어 흔히 등장하는 반대 논리는 “이러면 다 죽을 것이다”라는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걱정해야 할 것은, 현재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적절한 도움 없이 고통 속에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력사를 도입한 뒤에야 비로소 “삶을 살고 싶게 도와드리자”는 논의가 가능하다. 도움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 반대하는 것은, 지금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앞으로도 기약 없이 고통을 감내하라는 요구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그들이 조력사 반대를 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 환자들을 끝까지 이용하는 것 같아서 정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조력사 반대, 무책임한 태도의 극치

나는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조력사를 받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찬성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 자신은 알아서 타인이나 사회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삶과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생각이다. 그것과는 무관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분노를 느낀다. 그들의 주장은 일관성 없고, 환자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조력사 반대를 주장하는 이들 중, 실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회적 목소리를 내고 봉사해왔던 사람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반대론자는 단순히 감정적으로 끌려 반대를 외칠 뿐, 환자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환자의 고통을 외면한 위선

조력사 도입이 논의되자 일부에서는 “완화치료”를 갑작스럽게 거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고통받는 환자들에 대해 실질적으로 무엇을 해왔는가? 이제 와서 “사람이 쉽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환자들의 고통을 도외시한 위선적 태도에 불과하다.

돈이 없어서 눈치 보이며 죽음을 선택하는 게 왜 문제인가? 그 문제를 해결해줄 대안이 없다면, 오히려 조력사를 통해 환자들이 더 적은 고통 속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더 인간적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자의가 아니니 도와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잔인하다.


조력사를 반대하는 태도, 잔인함의 다른 이름

조력사를 통해 아픈 사람들이 줄어든다면, 남는 자원으로 살고 싶은 환자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도 있다. 이는 더 현실적이고, 모두에게 이로운 대안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설교가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이다.


결론: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

조력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와 태도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모순적인지 돌아봐야 한다. 이제는 현실을 인정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배려를 제공할 때이다. 조력사는 단순히 죽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선택을 존중하는 사회적 제도이다.

나는 조력사가 폭넓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야말로 산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더 존중하고, 인간적인 태도를 가지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프고 치료가 불가능한 사람들에게 조력사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비인간적이며,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은 결국 환자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기만족을 위한 위선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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