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의 배와 나: 자아를 정의하는 철학적 여정

과학자가 철학자들의 논쟁에 끼면 어떻게 될까? ㅋㅋㅋ (테세우스의 배🚢) I 철학을 보다 EP.13

나와 자아에 대한 철학적 고찰

물체의 정체성과 인식의 문제

물체의 정체성은 결국 그 물체를 바라보는 당사자의 인식과 생각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테세우스의 배를 예로 들어보자. 만약 누군가가 “이 배가 테세우스의 배가 맞다”고 믿는다면, 그 배는 테세우스의 배로 받아들여진다. 반면에, “이 배는 더 이상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 된다.

사회적으로도 이 원칙은 유효하다. 다수가 “맞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곧 사회적으로 “맞는 것”이 된다. 결국, 정체성이나 진실은 주관적 인식과 집단적 동의에 의해 정의되는 셈이다.

나라는 존재의 정의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정의될까? 나는 나 자신이 오직 나에 의해 정의된다고 믿는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내가 나를 고정시킬 수 있을 만큼의 명확한 무언가가 없다는 점이다. 나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기억의 파편들뿐이다. 게다가,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없다. 결국, 나라는 존재를 정의하는 것은 불완전하고 단편적인 기억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자아의 변화와 분리

나는 이 세상을 인식하는 나라는 자아가 고유하다고 믿는다. 이 자아는 이 세상과 완벽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다. 하지만, 이 자아가 단 하나의 고정된 존재라고 보기는 어렵다. 나의 경험과 생각이 변하면, 자아도 변한다. 새로운 경험과 사고가 기존의 자아와 결합하며 또 다른 자아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의 자아가 계속 갈라지는 것과 같다.

자아의 절대적 주관성

결국, 나라는 존재는 절대적으로 나의 관점에서만 정의된다. 내가 나를 정의할 때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 영역은 다른 사람이나 과학, 객관적 증거로는 입증할 수 없다. 설령 과학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보장은 없다.

이것이 바로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이며, 이 영역은 외부의 어떠한 힘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공간이다.

내가 단 하나의 고유한 존재는 아니지만, 나는 분명히 나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결론: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

내 자아는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화하며, 그 정의는 오직 나의 판단에 달려 있다. 나의 경험, 생각, 기억의 파편들이 나를 구성하고, 이 모든 것이 결국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낸다. 나는 이 변화와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며, 나를 정의하는 것이 내 스스로의 몫임을 깨닫는다. 이 주관적인 진실이야말로 나를 나답게 만드는 핵심이다.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나 또한 그 변화 속에서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간다. 이것이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고, 나를 바라보는 유일한 관점이다.

This entry was posted in 철학, 사회. Bookmark the permalink.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