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죽음, 고통에 공감하는 의미

우리도 동물이잖아. 동물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내가 느끼는 고통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해.

내가 교감할 수 있는 개나 고양이나 소나 돼지나 닭이 고통을 느끼는 것에 공감하는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래. 그럼에도 나도 온갖 동물을 먹어. 내 필요로 죽여야 할지도 모르고 난 나를 위해 그것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편함, 죄책감 같은 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거야. 동물을 잡아먹는게 당연한 권리 같은 건 아니라고 본다는 거야.

그냥 욕망? 욕심이 더 우선이 되는 거야. 그것을 하고 말고가 중요한게 아니고 그 행위에 대해서 더 확실히 이해하고 인지해야 한다는 거야.

그러면 당연히 자제라는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생기는 거야. 당연한 권리는 자제할 이유가 없는 거잖아?

.

.

무조건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고는 말 못하겠어. 바이러스인지 세균인지 내 눈에 안 보이는 그런 것들도 많잖아?

내가 움직이고 밥을 먹고 그런 평범한 행동들로도 수많은 생명이 죽고 또 생겨날 거야. 그것을 다 생각하고 신경쓴다면 나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을 거야. 아니 애초에 그냥 죽는게 정답이겠지.

내가 생각하는 관점은 내가 인지할 수 있는 생명에 대한 거야.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에 대해서 완벽하게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 그래서 다른 동물의 고통이나 죽음에 무감각할 수 있다면 정말 편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고 대다수의 인간도 마찬가지일 거야.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는게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분리해서 본다는게 꼭 불가능한 것만도 아닌 것 같아. 벌레를 잘 죽이는 사람도 친구나 가족의 아픔에는 공감할테니까.

그저 나는 최대한 공감의 폭을 넓히려고 애쓰는 중인 것 같아. 벌레도 되도록 안 죽이려고 하고 죽인다면 고통없이 보내주려고 노력하지.

이건 결국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인 것 같아. 남들한테도 이렇게 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니까.

하지만 동물의 죽음이나 고통에 대해서 감수하거나 무감각한 것에는 잘 이해가 안 가긴 해. 나도 결국 그 생산자들이 만들어서 죽여서 파는 것을 먹는 사람이니까 그것에 기여하는 사람이 맞지.

그럼에도 난 소나 돼지나 개나 고양이나 닭이나 등등을 팔려고 키운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가. 개나 고양이는 키우는 용도일 수 있지만 그게 아니면 무조건 죽는 거잖아.

어쨌든 나도 그 동물들의 죽음에 기여하고 있으면서 그들을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나쁘다고 표현할 수는 없는 거야. 그저 난 그러고 싶지 않고 못할 것 같다는 거야.

그냥 다른 것이지. 그냥 정말 쓸때없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건 있어. 난 그들을 막을 생각이 전혀 없어. 그것이 잘못된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아.

하지만 나는 그런 불편한 것을 보고싶지 않아. 또한 나는 그것이 괜찮다고,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야.

그저 이성적으로 인정할 뿐인 거야. 난 나대로 동물이 덜 죽도록 되도록 육식을 자제하며 살아갈 뿐이야.

.

.

어떤 관점에서 보면 자연이랑도 상관은 없다. 내가 키워서 내가 먹으면 주변에 피해주는 것도 없고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말이다.

그런데 그런 관점으로 보면 인간도 마찬가지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인간을 죽이거나 해치는 것도 이 사회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변에 친구, 가족이 없는 사람이나 노숙자나 감옥에 범죄자는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생명에 감정이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필요하고 필수적으로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하는 하나의 필수 덕목?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

.

20230124/
다른 동물의 고통을 그저 전기적인 신호? 본능적인 반응? 어떻게 보면 프로그램이나 기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식이면 인간의 고통도 마찬가지로 가짜라고 할수도 있는 것 아닌가?

결국 우리가 생명이고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고통을 진짜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동물의 고통도 당연히 진짜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시선, 관점으로 보면 고통이고 죽음이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냥 나만 대충 살다가 세상과 이별하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그 허무한 삶을 주관적으로 보면 그 불안하고 짧은 삶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사실 무한한 것은 어찌보면 아무 의미도 없는 무와 같은 것이라고 할수도 있는 것이다.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더 의미있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샜는데, 다른 생명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결국 나라는 존재를 더 소중하게 여기려는 마음과 노력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라는 존재를 소중하게 여기고, 나는 생명이기 때문에 다른 생명도 소중하게 대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This entry was posted in 잡담 and tagged . Bookmark the permalink.

댓글 남기기